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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내 생각에 창문을 내는 일 - 정신의 발달 과정

by 칠보 2026.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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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하비 로빈슨 교수의 명저 “정신의 발달 과정”의 한 구절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중에서

 

우리는 아무런 저항감이나 별다른 감정 없이 생각을 바꾸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우리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기라도 하면 분개하며 고집을 부린다. 우리는 믿음을 형성하는데 있어서는 놀라울 만큼 경솔하지만, 누군가가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할 때에는 그 믿음에 쓸데 없이 집착하게 된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그 생각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전받는 우리의 자존심인 것이다.

 

“나의”라는 말은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이며, 따라서 이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움의 시작이다. 이것은 “나의”저녁식사, “나의”개, “나의”집, “나의”아버지, “나의”조국, “나의”하나님등에서 보듯이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기것이라면 시계든 자동차든 혹은 천문, 지리, 역사, 의학지식이든, 그것을 헐뜯기만 하면 여하튼 불같이 화를 낸다. 우리는 진실이라는 습관적으로 생각해온 것들을 언제까지나 믿고 싶어한다. 그 신념을 뒤흔들려는 것이 나타나면 분개한다. 그리고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그 믿음을 지키려고 한다. 결국 대부분의 논쟁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들을 옹호하기 위하여 그 논거를 찾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카알 로저스는 “인간이 되는 길”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당신은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허락하는 일이 과연 필요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제일 먼저 취하는 반응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평가나 혹은 판단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 자기의 기분이나 태도, 혹은 신념을 나타낼 때 우리는 대개 즉시 ‘옳다’ ‘어리석다’ ‘비정상적이야’ ‘이치에 맞지 않아’ ‘틀렸어’ ‘좋지 않군’하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내 생각에 창문을 내는 일

 

아직도 누군가와 표현의 차이, 생각의 차이로 말다툼을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서로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얘기만을 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되풀이한다. 엊그제도 별거 아닌거 가지고 동료와 말다툼을 했다. 결론에 이르지도 못했고 내생각도 바뀌지 않았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야 상대방의 말이 제대로 들릴 때가 있다. 마주 앉아 있을 때는 그렇게 허술하던 이야기가 혼자 걷는 동안에는 제법 사리에 맞는다. 그가 들었던 예도 떠오르고, 말을 고르느라 잠시 머뭇거리던 표정도 생각난다. 조금 전까지 나는 무엇을 듣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의 말을 듣는 내내, 다음에 내가 할 말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 생각은 틀린 것 같은데”라고 말하면 마음은 내용보다 먼저 그 말투를 붙잡는다. 나를 얼마나 안다고, 자기는 얼마나 잘났다고. 처음에는 작은 의견 차이였던 것이 어느새 나를 존중하느냐의 문제로 커진다. 방금 전까지 대수롭지 않게 꺼냈던 생각을 지키기 위해 오래된 기억을 뒤지고, 어디선가 읽은 문장을 불러온다. 이상하게도 근거는 화가 난 뒤에 더 많이 떠오른다.

그 생각을 처음 갖게 된 날을 떠올려 보면 조금 민망해진다. 충분히 따져 보고 얻은 결론도 있지만,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익숙해져 내 생각이 된 경우도 적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이 한 말이어서 받아들였고, 내 경험 하나와 들어맞아서 믿었다. 그렇게 가볍게 들어온 생각도 오래 머물면 주인의 대접을 받는다. 거기에 ‘내 생각’이라는 이름까지 붙고 나면,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마치 허락 없이 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처럼 느껴진다.

‘나의’라는 말에는 온기가 있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집. 우리는 그 말 안에 사랑과 책임을 담는다. 그러나 같은 말로 울타리를 세우기도 한다. 내가 택한 것, 내가 믿어 온 것, 내가 살아온 방식이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좀처럼 들여놓지 않는다. 생각 하나를 고치는 데도 지난 세월 전부를 부정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때로는 틀린 줄 어렴풋이 알면서도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 물러서면 내가 작아질 것 같아서다. 대화가 끝나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끝까지 내 주장을 지켰는데, 정작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못했다는 감각이 남는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도록 자신에게 허락한다는 말은 이 지점에서 오래 머물게 한다.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데 무슨 허락까지 필요할까 싶지만, 실제로 우리는 자주 자기 마음을 막아선다. 저 말을 끝까지 들으면 내 판단을 고쳐야 할지도 모른다. 싫어하던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렸는데, 이해는 그 결론을 다시 펼쳐 보라고 한다.

 

한 번쯤은 익숙한 대답을 늦춰 보고 싶다. “그건 아니지”라는 말이 혀끝에 맺혔을 때,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질문을 던져 놓고 반박할 틈을 찾는 대신, 그가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 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옳고 그름을 가리느라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어떤 경험 때문에 그 말을 쉽게 놓지 못하는지.

물론 끝내 동의하지 못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서로의 말을 조금 더 정확하게 알고 헤어질 수는 있다. 내 주장이 닿지 않았다는 아쉬움 속에서도, 적어도 상대방이 나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는 안도는 남길 수 있다. 다음 대화는 그만큼 덜 막막해질 것이다.

생각이 바뀌는 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제의 나는 어제까지 알던 것으로 판단했다. 오늘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만큼 고쳐 앉을 수도 있다. “듣고 보니 내가 놓친 것이 있네”라는 말 한마디를 하고 나면, 지키느라 힘을 주었던 어깨가 의외로 가벼워질지도 모른다.

다음에 누군가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마음속 창문 하나를 열어 두고 싶다. 바람이 들어와 책상 위의 종이 몇 장을 흐트러뜨릴 것이다. 순서가 바뀐 종이를 다시 정리하다가, 오래 덮어 두었던 한 줄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듣고 싶어질 것이다. 내가 아직 가 보지 못한 쪽의 이야기를.

 

 

P.S. 최근 한 정당에서 둘로 갈라져 서로의 얘기를 듣지 않고 주장만을 일삼고 있다. 철천지 원수가 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가 옳다는 믿음, 그 사소한 믿음의 과정에서 온 확신이 점점 틈을 벌려가고 있다.

 

2026.9.18.

(c) 칠보 (chil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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