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하면 1998년 6월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던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같은해 말 금강호를 타고 북한의 장전항에 도착한 관광객들이 금강산에 들어가는 TV화면을 보면서 나는 통일이 되면 첫 번째 장면, 그 시작점은 반드시 정주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통일에 대한 그때 그 원대했던 꿈은 아직도 더디지만 진행형이다. 그 많은 세월동안 우리가 기찻길이라도 뚫려 유럽 기차 여행이라도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성실과 신용을 바탕으로 실천을 중요시한 기업가 정주영에 대한 책 "이땅에 태어나서"를 읽고 생각해 본다.
1915년 북한 강원도 통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난을 통해 겪었던 많은 시련들과 여러번의 가출을 통해 도시로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은 것이 쌀가게 복흥상회에서 배달원으로 취직한 일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일하는데에 꾀부리는 버릇이 없는 그는 농사일에 비하면 일도 아닌 쌀가게 일을 하는데 농사일을 하듯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이후 주인아저씨의 신임을 받아 장부정리도 하고 내리 사흘 동안 거의 밤잠을 안자고 자전거 배달연습도 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실성을 바탕으로 일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쌀가게를 인수하여 처음으로 사장이 된다. 그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평생을 언제나 그 시절 자전거 쌀 배달꾼 연습때처럼 최선의 노력을 쏟아 부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때가 거대한 현대라는 기업을 이루고 국가와 사회의 부강을 위해서 평생 동안 흘려왔을 땀과 눈물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작은 성공을 이룬셈인데 어느 인생이든지 이러한 중요한 순간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성실한 사람이 끝내 성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믿음의 순간 말이다. 그는 쌀집을 접고 본격적으로 사업규모가 큰 건설업에 뛰어든다. 전쟁이 끝나고 고령교라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 복구공사를 수주하게 된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현장 상황과 치솟는 물가로 공사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공사를 중도포기하자는 의견에 사업가는 신용이 제일인데 신용을 잃으면 끝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건설업체를 만들자는 게 그의 꿈인데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털고 많은 적자를 내면서 결국 공사를 마무리한다. 그는 이 공사로 인한 실패를 단순히 운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고 있었다. 공사를 따는 것에만 집착했지 다른 면에 대해서 치밀하게 계산하고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에 게을렀다는 자평을 했다. 기업을 하는데 있어 신용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고 실패를 통해서도 배운 것이 많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려준다. 그는 이를 시련이라 했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정주영은 이러한 성실과 신용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50년 역사를 일궈내는 주역이 된다.
“정주영”하면 1998년 6월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던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같은해 말 금강호를 타고 북한의 장전항에 도착한 관광객들이 금강산에 들어가는 TV화면을 보면서 나는 통일이 되면 첫 번째 장면, 그 시작점은 반드시 정주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서 열정적인 모습으로 일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많은 기업을 일으켜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반세기도 안 되어 전쟁의 아픔을 딛고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현재의 우리가 사는 나라의 터전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그가 이 땅에 태어나 자라고 기업을 일으키고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만들었던 일들을 보면서 전쟁이 끝나고 한숨에 달려온 50년 격동의 대한민국 역사를 보는 듯 했다. 정주영은 본격적으로 건설업을 시작으로 사업을 시작하였고 건설업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로 중공업분야로 확대한다. 끊임없이 해외시장을 개척하고자 했으며 어떻게든 자력으로 기업을 세우고 키우고자 했다. 해외건설 시장의 첫 스타트인 태국 파타니 나리티왓 고속도로 공사의 수주는 향후 국내 고속도로 건설의 발판이 되었다. 국가와 더불어 성장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기업을 일구었다.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설계되어 있던 댐을 철근도 수입에 의존해야하고 시멘트도 부족한 상황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자갈과 무진장한 모래를 떠올리며 사력댐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결론을 얻고 정부를 설득하여 설계를 바꾸고 30%이상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던 소양감댐 건설 사례를 통해 소위 애국이라는 것을 실천한 것이다. 빚내다 하는 공사에 쓸데없이 남의 나라 좋은 일 시킬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으로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도로, 항만, 댐, 교육, 문화시설등 각종 사회간접자본의 대부분을 현대가 만들게 된다. 대동맥 경부고속도로도 그렇게 건설이 되었다. 일정단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러한 열정으로 많은 아이디어들이 실현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비록 군사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지만 국가발전에 대한 열정과 집념과 소신 그리고 그 철저한 실행력을 바탕으로 정주영은 사심없이 나라만을 생각하던 대통령을 도와 한푼이라도 적은 예산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코자 하였으며 박정희와 정주영은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국가를 재건하는데 혼신을 다하였다.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초기의 참혹한 실패와 경영압박을 딛고 국산화를 통해 해외 유수의 자동차 업체의 한국진출을 막아냈다. 정주영은 그 당시에도 자동차가 미래의 주종 사업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대자동차에 열정을 쏟았고 지금은 현대자동차의 이미지 덕분에 다른 상품들이 덩달아 높이 평가받을거라는 그의 예언은 적중하고 있다. 조선소 건설의 꿈을 잃지 않고 조선소 건설이 장차 현대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온갖 역경을 뚫고 현대조선을 완성하고 배를 납품한다. 그후 아세아 상선을 설립해서 해운업에 진출한다. 그리고 이어진 중동진출을 통한 외화를 벌어들여 외채부도가 해결되도록 하였다. 사우디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입찰과정을 통해 얼마나 절실하게 사업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외된 사람을 위한 아산재단을 설립한다.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람이다. 가정과 사회, 국가의 주체도 역시 사람이다. 그래서 다같이 건강하고 유능해야 가정과 사회, 국가가 안정과 번영을 이룰수 있다고 했다. 이후 1980년대에 중공업을 대체할 새로운 수출주도산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자동차, 중공업에 이어 반도체를 통한 수출주도 산업을 위해 현대전자를 설립한다. 국토를 넓히기 위한 서산간척지사업과 정주영공법으로 유명한 유조선공법을 시도하여 성공한다. 그리고 금강산 개발은 아직도 그에게 ‘반드시 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했지만 1998년 11월18일에 첫 관광이 이루어지고 정주영의 생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정주영은 조국통일의 남북경협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하였고 현대그룹에서 그꿈을 이어가면서 진행중이다. 정주영은 통일은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통일이 되면 우리가 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은 이루어지고 있다.
정주영은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정신으로 격동의 50년을 국가의 재건을 위해 혼신을 다해 수많은 일을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무슨 일에나 최선의 노력을 쏟아 부으면 성공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해왔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고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지식으로 올바른 앎에 이르자면 사물에 직접 부딪혀 그 속에 있는 가치를 배워야 한다는 대학의 치지재격물을 좋아했다. 참다운 지식은 직접 부딪혀 체험으로 얻는 것이며 그래야만 가치를 제대로 아는 법이라고 했고 무모했지만 그 무모함이 부른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뛰어넘고 쳐부수면서 산공부를 하고 그만큼 철저하게 강인해졌다는 일화가 주는 생동감은 큰 울림이 된다. 또한 그 유명한 ‘하면 된다.’ ‘해보기나 했어?’하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가진 그야말로 실천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아는 실천가였다. 인생이란 시련의 연속이며 연속되는 시련과 싸우면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다등의 수많은 명언을 만들어 내며 우리들에게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또한 선박을 철판으로 만든 덩치 큰 탱크라고 생각하고 5백원짜리 지폐로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의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선 얘기등은 유명하다. 그는 아무리 부자여도 검소, 근면, 절약, 신용을 모토로 생활하였으며 기업이란 국가 살림에 쓰이는 세금의 창출에 큰 몫으로 기여하면서 보다 발전된 국가의 미래와 보다 풍요로운 국민생활을 보람으로 알고 일하는 집합체이지 어느 개인의 부를 증식시키기 위해 혹은 폼내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일념으로 기업가의 길을 걸어왔다. 또한 한국의 근로자들이야말로 건설과 조선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들이다라고 했다. 불도우저라고 불렸던 정주영은 학식이 없다고 해서 생각도 머리도 지혜도 없은 것은 아니며 자신에게는 남보다 열심히 생각하는 머리가 있고 남보다 치밀하게 계산하는 능력이 있으며 남보다 적극적인 모험심과 용기와 신념이 있다고 했다.
정주영과 그 시대의 사람들은 낮도 밤도 없이 거의 365일 돌관 작업을 해냈다.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했을까? 가난과 역경의 시대를 살면서 이 땅을 사랑하고 우리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손에 물려줄 땅과 나라는 그때보다 더 잘살고 행복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정주영과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서 살았다기 보다는 미래의 후손을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일을 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러한 그들의 노력덕분에 너무나 풍부한 물자와 자원과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는 그렇게 된 사회가 마치 우연히 또는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누리며 사는데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애국애족의 낡은 개념이 아니라고 해도 수많은 땅과 건물 속에서 그저 빌려 살기만 하고 더는 발전시키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후세를 위해 살았고 우리는 나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꿈꾸던 대한민국 국민은 성실하고 어질고 착하고 그러면서 우수하여 10년, 20년 노력하면 우리가 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고 세계의 모범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나 우리나라는 국민이 똘똘 뭉쳐 현명하게 코로나19상황을 대처하고 있고 그의 이야기처럼 이를 통해 이미 세계의 모범국가가 되고 있다. 그가 꿈꾸던 대한민국은 통일이 되고 남북으로 연결된 철도로 기차를 타고 유럽을 가는 그날을 바랬을 것이고 그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후손들이 그 꿈을 이어받아 통일에 더 나아가 세계에 우뚝서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시대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주영은 “신념의 바탕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 부으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중의 한사람일뿐”이라고 겸손하여 낮추었지만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나도 남은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하여 이 사회에 기여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제2의 인생에서 창업을 꿈꾸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나머지 자본금을 헛되이 쓰지 말고 성실하게 나라와 인류를 위해 살아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소비하지 않고 생산하고 창조하는 일을 보다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성실과 신용을 바탕으로 실천을 중요시한 기업가 정주영의 삶을 돌아 보면서 시련에 빠진 오늘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이 땅의 밝고 새로운 희망을 위하여 그의 살아있는 정신이 널리 퍼져 나가길 빌어 본다.
2021.2.17. (작성) 정주영의 “이땅에 태어나서”를 읽고...
2023.12.17. (편집)
(c) 칠보 (chil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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